
1. 영화 이터널 선샤인
2004년 미국에서 처음 개봉한 영화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은 프랑스 출신의 비주얼 아티스트이자 감독인 미셸 공드리가 메가폰을 잡고, 천재 작가 찰리 카프먼이 각본을 맡아 탄생한 로맨스 SF의 걸작입니다. 코미디의 대명사였던 짐 캐리가 내성적인 주인공 조엘 역을 맡아 섬세한 정극 연기를 선보였으며, 케이트 윈슬렛이 자유분방한 여주인공 클레멘타인으로 분해 완벽한 호흡을 맞췄습니다. 이 외에도 커스틴 던스트, 마크 러팔로, 일라이저 우드 등 화려한 조연진이 가세하여 극의 완성도를 높였습니다.
영화는 제7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을 수상하며 그 독창성을 인정받았고, 케이트 윈슬렛은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는 등 비평가들의 극찬을 받았습니다. 특히 한국에서는 2005년 첫 개봉 당시보다 10년 뒤인 2015년 재개봉 때 더 큰 흥행을 기록하는 이례적인 현상을 보였는데, 재개봉 관객 수가 원년 개봉 성적을 훌쩍 뛰어넘으며 누적 관객 50만 명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미셸 공드리 감독이 특유의 아날로그 방식을 고집하여 컴퓨터 그래픽(CG)을 최소화하고 거울, 원근법, 조명 전환 등의 실제 세트 트릭을 통해 조엘의 무너지는 기억 세계를 환상적으로 구현해 냈다는 점이 유명합니다.
2. 줄거리
평범하고 내성적인 남자 ‘조엘’(짐 캐리)은 어느 날 충동적으로 회사에 출근하지 않고 몬탁 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가 그곳에서 파란 머리의 자유분방한 여인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을 만나 강렬한 이끌림을 느낍니다.

하지만 이 만남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두 사람은 2년간 뜨겁게 사랑했던 연인이었으나, 반복되는 다툼 끝에 클레멘타인이 기억을 지워주는 회사 '라쿠나'를 찾아가 조엘에 대한 모든 기억을 삭제해 버린 상태였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큰 상처를 받은 조엘 역시 복수심에 자신의 기억을 지우기로 결심하고 ‘하워드 박사’(톰 윌킨슨)를 찾아가 기억 삭제 시술을 받기 시작합니다.

시술이 진행되며 조엘의 머릿속에서는 최근의 아픈 기억부터 시작해 행복했던 과거의 순간들이 역순으로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조엘은 무의식 속에서 자신이 클레멘타인을 여전히 깊이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고, 삭제되는 기억들을 지키기 위해 클레멘타인의 손을 잡고 시술자가 찾지 못하도록 어린 시절이나 수치스러운 비밀 등 상관없는 기억의 구석진 곳으로 도망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라쿠나의 직원인 ‘스탠’(마크 러팔로)과 ‘패트릭’(일라이저 우드)의 추적으로 인해 결국 기억은 하나둘씩 파괴되고, 조엘은 마지막으로 그녀와 처음 만났던 몬탁의 해변 집에서 몬탁에서 만나자는 속삭임을 남긴 채 모든 기억을 잃게 됩니다.
다음 날 아침, 기억이 삭제된 채 깨어난 조엘은 알 수 없는 이끌림에 몬탁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역시 기억이 없는 클레멘타인을 다시 만나 사랑에 빠진 것이 영화의 오프닝이자 현재의 시점이었음이 밝혀집니다.

한편, 하워드 박사의 비서인 ‘매리’(커스틴 던스트)는 과거 자신도 박사와 사랑에 빠졌다가 기억을 삭제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분노하여 고객들의 녹음테이프를 모두 발송해 버립니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서로의 험담이 담긴 테이프를 들으며 당혹감과 실망감에 휩싸이지만, 조엘은 다시 상처받을 것을 알면서도 "괜찮아요(Okay)"라고 말하며 그녀를 받아들입니다. 결국 두 사람이 눈 덮인 해변을 함께 뛰노는 반복되는 장면은, 사랑의 아픔보다 그 과정의 소중함을 선택한 이들의 숭고한 재회를 보여주며 긴 여운을 남깁니다.
3. 평가
<이터널 선샤인>은 기억의 소멸이라는 공상과학적 설정을 빌려 인간의 존재론적 성찰과 사랑의 본질을 파고든 포스트모던 로맨스의 정점이라 평가할 수 있습니다. 찰리 카프먼의 각본은 선형적 시간 축을 해체하여 기억의 파편들이 무작위로 충돌하게 함으로써, 관객이 단순히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을 넘어 주인공 조엘의 심리적 미로에 직접 동참하게 만듭니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기억은 지워져도 감정의 흔적(Trace)은 각인된다'는 인지 과학적 상상력을 철학적 차원으로 격상시킵니다. 특히 조엘이 기억의 삭제를 막기 위해 자신의 가장 부끄러운 무의식 구석으로 클레멘타인을 숨기는 시퀀스는, 사랑이 단순한 정보의 집합이 아니라 한 인간의 정체성과 얼마나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지를 시각적으로 완벽하게 증명해 냅니다.
미셸 공드리 감독의 연출은 디지털의 매끄러움 대신 아날로그적 질감을 선택함으로써 영화의 진정성을 확보했습니다. CG를 최소화하고 원근법을 활용한 트릭 세트나 실시간 조명 전환을 이용한 기억의 붕괴 연출은, 기억이 가진 가변적이고 불완전한 속성을 탁월하게 묘사합니다. 또한 카메라가 피사체를 집요하게 쫓는 기법과 거친 입자감의 화면 구성은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관계가 가진 불안정성을 극대화합니다. 연기 측면에서도 평소 에너지를 과하게 발산하던 짐 캐리를 극도로 억제시키고, 반대로 정적이었던 케이트 윈슬렛을 폭발적인 캐릭터로 설정한 페르소나의 반전은 영화에 신선한 생명력을 불어넣었습니다.
결국 이 영화의 가장 날카로운 통찰은 "망각한 자는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는 니체의 구절을 매리(커스틴 던스트)의 입을 통해 인용하면서도, 역설적으로 그 망각의 위험성을 경고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기억이 삭제되어도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는 인물들의 모습은, 고통스러운 과거가 곧 미래를 위한 유일한 학습장임을 시사합니다. 엔딩에서 두 주인공이 서로의 밑바닥을 확인하고도 다시 시작하기로 하는 "Okay"라는 짧은 긍정은, 사랑의 낭만성이 아닌 고통을 포함한 삶의 총체성을 받아들이는 성숙한 실존적 결단입니다. <이터널 선샤인>은 로맨스 영화의 문법을 파괴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가장 위대한 로맨스 영화가 되었습니다.

4. 제작비화
1) 이 영화는 알랭 레네 감독의 1968년 작 <사랑해 사랑해'(je t'aime je t'aime>로부터 영감을 많이 받았습니다. 실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남자 주인공이 기억과 관련된 실험을 받다가 기억이 엉켜 헤맨다는 설정에서 그 영향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2) BBC에서 선정한 21세기 최고의 멜로 영화로 뽑히긴 했으나, 사람마다 호불호가 갈리는 것은 사실입니다. 가장 큰 부분은 영화 마지막에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서로 기억을 삭제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상대방에 대한 안 좋은 기억들을 다시 듣고도 연인 관계를 이어간다는 장면입니다. 물론 이러한 전개도 가능한 스토리이긴 하나 관객에 따라서는 너무 스토리를 비튼 느낌도 있고 이를 위해 영화 마지막 부분이 다소 성급하게 정리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서로의 기억이 삭제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충격, 거기에 더해서 상대방에게 느꼈던 안 좋은 감정들을 적나라하게 듣고 나서의 감정적 상처를 치유해 가는 과정이 너무 간단하게 극복돼 버립니다. 다만 처음 볼 때보다 두 번째 세 번째 볼 때 여운이 더 커지며 특히 이별을 여러 번 겪은 후 나이가 들어 다시 보면 새롭게 다가온다는 관객 평가가 많은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3) 배우들의 애드리브에 상당히 의존한 영화입니다. 예를 들어 기억 삭제 중에 마크 러팔로와 커스틴 던스트가 침대 위에서 속옷 차림으로 춤을 추는 장면이 있는데 그것도 대본 없이 배우들이 즉흥적으로 연기한 장면입니다.
4) 마크 러팔로와 커스틴 던스트의 섹스 장면은 촬영까지 했지만 나중에 불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삭제되었습니다. 섹스 신은 광매체 서플먼트로도 수록되지 않아 일반 관객은 볼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5) 부엌 싱크대에서의 입수 촬영은 2시간이 넘게 소요돼 케이트 윈슬렛은 실신 직전까지 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감독은 계속 촬영을 강행했고, 참다가 화난 짐 캐리가 결국 강하게 항의하며 케이트 윈슬렛의 체력이 돌아올 때까지 촬영 거부 선언을 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6) 케이트 윈슬렛의 머리 색깔은 작중 인물의 심리 및 기억 여부에 따라 달라지는데 그 사실을 감안해서 보면 깨알 같은 재미가 있습니다. 촬영은 시간 순서대로 진행하지 않았기에 그때그때 염색은 쉽지 않아 결국 전부 가발로 대체되었습니다.
7) 극 중 짐 캐리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 얼굴은 대충 뭉갠 듯한 묘한 형태의 이미지로 대체되었는데, 사실은 각 배우의 무릎을 찍어 합성한 모습입니다.

5. 마무리
평생 한 편의 영화만 반복해서 봐야 한다면 주저 없이 선택할 만큼, <이터널 선샤인>은 볼 때마다 새로운 층위의 감정이 발견되는 인생 영화의 표본입니다. 처음 봤을 때는 기억이 지워지는 비주얼 쇼크와 판타지적 설정에 매료되었다면, N차 관람을 반복할수록 가슴을 후벼 파는 건 결국 '사랑의 유한함'을 알면서도 다시 뛰어드는 인간의 미련하고도 아름다운 본성입니다. "이 기억만은 남겨주세요"라고 울부짖는 조엘의 절규는 사랑이 끝난 후 우리가 겪는 상실감을 그 어떤 신파보다 더 처절하게 그려내며, 권태기에 찌든 연인들의 날 선 대화들은 하이퍼 리얼리즘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이 영화가 특별한 이유는 미셸 공드리가 구축한 그 특유의 빈티지한 미장센 때문이기도 합니다. CG가 줄 수 없는 투박하고도 따뜻한 아날로그 연출은 마치 내 머릿속 어딘가에 실재하는 기억의 도서관을 엿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특히 클레멘타인의 머리 색이 파란색에서 주황색으로 변함에 따라 두 사람의 관계와 계절감이 교차하는 디테일은 소름 돋는 카타르시스를 선사합니다. 결국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후회를 넘어서서, "그 고통까지도 나라는 사람의 일부"임을 긍정하게 만드는 이 영화의 엔딩은 삶의 모든 흉터까지 사랑하게 만드는 기묘한 힘이 있습니다.
<이터널 선샤인>은 지금 바로 극장의 대형 스크린에서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헤어짐의 끝에서 재회한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마법 같은 순간이 전국 극장에서 재개봉되어 상영 중이니, 소중한 사람과 함께 그 감동의 여정에 동참해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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