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2026년 2월 4일 개봉한 장항준 감독의 첫 사극 영화로, 조선 제6대 국왕 단종의 유배 생활을 다룬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배우 유해진이 단종의 유배지인 영월 광천골의 촌장 엄흥도 역을 맡아 극의 중심을 잡으며, 가수 출신 배우 박지훈이 비운의 왕 이홍위(단종)를 연기해 깊이 있는 감정선을 선보입니다. 여기에 유지태(한명회 역), 전미도(상궁 매화 역) 등 탄탄한 연기력을 갖춘 배우들이 합세해 역사의 비극 속에 가려진 인간적 교감을 그려냈습니다. 영화는 개봉 첫날 11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으며, 실관람객 평점인 에그지수 99%를 기록하는 등 평단과 관객으로부터 높은 완성도를 인정받았습니다.
장항준 감독이 시나리오를 받고 사극이라는 장르의 특수성 때문에 고민했으나, 아내인 김은희 작가의 강력한 추천과 "좋은 예감이 든다"는 조언에 연출을 결심했다는 비하인드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단종의 시신을 거둔 엄흥도의 짧은 역사적 기록에 상상력을 더해, 역사의 거대한 흐름보다 그 곁을 지킨 소시민들의 시선에 주목했다는 점이 관전 포인트로 꼽힙니다.
2. 줄거리
영화는 수양대군의 찬탈로 인해 어린 나이에 폐위된 단종, '이홍위'(박지훈)가 머나먼 강원도 영월의 광천골로 유배를 오며 시작됩니다. 그곳의 촌장인 '엄흥도'(유해진)는 조정의 감시와 서슬 퍼런 칼날 아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철저히 순응하며 살아가던 인물이었으나, 초라한 행색으로 유배지에 도착한 어린 왕의 모습에서 측은지심을 느끼며 점차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엄흥도는 처음에는 엮이기 싫어 거리를 두려 했지만, 고립된 환경 속에서 단종의 유일한 말동무이자 보호자 역할을 하게 되며 신분을 초월한 우정을 쌓아갑니다. 여기에 단종을 끝까지 보필하는 상궁 '매화'(전미도)가 합류하여 유배지에서의 고단한 일상을 버텨내지만, 한양에서는 '한명회'(유지태)를 필두로 한 세력이 단종의 존재 자체가 정권의 위협이라 판단하고 끊임없이 암살의 기회를 노립니다.

* 지금부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세력의 움직임이 발각되자 조정의 압박은 극에 달하고, 결국 단종에게 사약이 내려지는 비극적인 국면을 맞이합니다. 엄흥도는 자신의 가족과 마을 사람들의 안전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단종을 끝까지 지키려 고군분투하지만, 결국 단종은 엄흥도와 매화의 눈물 섞인 배웅 속에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입니다. 단종이 승하한 후 조정에서는 그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하겠다는 엄포를 놓지만, 엄흥도는 "옳은 일을 하고 화를 입는 것은 달게 받겠다"는 결단을 내립니다.
그는 영월 동강에 내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아무도 모르는 산자락에 정성껏 묻어준 뒤, 자신 역시 가족과 함께 종적을 감추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후기 내레이션으로연려실기술과 조선왕조실록 등에 기록되어 전해지는 단종의 최후와 함께 조선 후기 숙종 때 노산군이 '단종'으로 추존되어 복권되었고, 엄흥도의 묘 역시 단종이 묻힌 영월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을 밝히며 영화가 끝납니다.
3. 평가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권력의 정점에서 밀려난 패자와 그를 품은 변방 소시민의 관계를 통해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 아래 가려진 인간적 도의를 예리하게 포착해 낸 수작입니다. 장항준 감독은 기존 사극들이 탐닉하던 궁중 암투의 자극적인 묘사를 과감히 덜어내는 대신, 영월이라는 고립된 공간 안에서 피어나는 심리적 밀도에 집중함으로써 장르적 신선함을 확보했습니다. 특히 엄흥도(유해진)라는 인물을 단순한 충신이 아닌, 생존과 양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입체적인 소시민으로 설정한 점은 관객의 정서적 몰입을 이끄는 결정적인 장치가 됩니다. 여기에 단종(박지훈)이 보여주는 서늘한 고독과 한명회(유지태)의 압도적인 위압감이 팽팽한 대척점을 이루며, 영화는 시종일관 정적인 가운데서도 폭발적인 긴장감을 유지합니다.
대중적으로는 전반적으로 오랜만에 괜찮은 한국 사극 영화가 나왔다는 평이 많습니다. 역사적 고증이나 사극적으로는 호평을 받고 있으며 강원도 영월군과 단종에 대해 향토사와 감정적으로도 지나친 신파도, 희화화도 없게 적절하게 다루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특히 주인공 유해진의 연기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배우 박지훈 역시 첫 상업영화 주연으로, 개봉 전에는 다소 우려가 있었으나 다른 주연들에 밀리지 않는 높은 몰입도의 연기로 호평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최종보스 격인 한명회를 맡은 유지태의 악역 연기도 무자비한 권신의 면모를 표현했다며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평론가 이동진, 박평식에게 모두 호평을 받았음이 알려지며 알음알음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의 진정한 성취는 '죽음'이라는 정해진 결말을 다루는 태도에 있습니다. 감독은 단종의 승하를 정치적 패배로 기록하기보다, 그 시신을 거두는 엄흥도의 결단을 통해 '기록되지 않은 자들이 완성하는 역사의 품격'을 조명합니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비극을 재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거대한 시스템의 폭력 앞에서도 개인이 지켜내야 할 최소한의 인간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유해진의 절제된 감정 연기와 박지훈의 처연한 눈빛, 그리고 탐미적인 영상미가 결합된 이 영화는 결국 역사는 승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그 곁을 지켰던 평범한 사람들의 온기로 기억되는 것임을 증명하며 한국 사극의 지평을 한 단계 넓혔다고 분석할 수 있습니다.

4. 제작비화
1) 장항준 감독의 첫 사극 연출작입니다.
2) 장항준 감독과 유해진은 서울예대 선후배 사이이며, 2002년 영화 <라이터를 켜라>를 촬영하면서 인연을 맺어서 그때부터 매우 친하게 지내왔다고 합니다.
3) 박지훈은 단종을 연기하기 위해 15kg을 감량했습니다. '피폐해진 모습보다도 더 나아가 피골이 상접했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냥 말랐다기보단 너무 안 됐다는 말을 듣는, 입술도 버석하게 말라 있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 보이는 애처럼 보이고 싶었다'라고 합니다.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과 한쪽만 먹으면서 버텼고, 촬영 중에도 목소리에 버석함이 있으면 좋겠어서 물도 최대한 안 먹었다고 합니다.
4) 감독은 처음에는 모두가 다 아는 이야기를 다시 구성하는 게 부담되었지만 <서울의 봄>을 보고 용기를 얻었다고 합니다. 역사적 애통함이나 좌절을 모두가 알고 있더라도 그 안에 담긴 감정을 이끌어내면 많은 사람들이 몰입하여, 역사적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서울의 봄>의 감독 김성수는 이 말을 듣고 엄청 좋아했다고 합니다.
5) 단종과 '계유정난'을 다룬 매체라면 빠질 수 없는 수양대군이 언급만 되고 등장하지 않는 것이 특징입니다. 작중 시대상 최종 보스 격이 되는 인물인 만큼 특별출연으로라도 등장하지 않겠는가 하는 예상이 있었으나, 감독이 본 작품에서 권력의 얼굴은 한명회라면서 등장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6) 대부분의 사극이 궁궐을 배경으로 하는 반면 이 영화는 오히려 궁궐 밖에서 이야기가 이루어집니다. 실제 로케이션은 영월, 문경, 고령, 평창 등 국내 곳곳을 돌아다녔습니다. 작중 무대인 단종의 유배지는 영월의 '청령포'인데 이곳은 완전히 관광지가 되어버려서 제작진은 최대한 유사한 다른 장소를 섭외했습니다.
7) 이 영화의 개봉 이후 세조의 광릉은 카카오맵에서 대대적인 별점 테러를 당해 별점이 1.5점까지 내려갔으며, 장소 세이프 모드가 발동되어 후기창이 임시 폐쇄되었습니다...

5. 마무리
<왕과 사는 남자>는 장항준이라는 창작자가 가진 '유연한 낙관주의'가 비극적인 역사와 만났을 때 얼마나 기묘하고도 아름다운 시너지를 내는지 확인시켜 준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사실 단종의 이야기는 한국 관객에게 너무나 익숙한 사골 같은 소재라 자칫 진부해질 위험이 컸지만, 이 영화는 권력자의 시선이 아닌 유배지의 흙먼지 묻은 소시민 엄흥도의 눈높이로 카메라를 낮추며 완전히 새로운 호흡을 만들어냈습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장르의 변주인데, 초반부 엄흥도의 생활 연기에서 묻어나는 장항준식 유머가 극 후반부 단종의 처연한 죽음과 대비되며 관객의 감정을 더욱 거세게 몰아붙입니다. 이는 단순히 울리기 위한 신파가 아니라, 평범한 일상이 권력이라는 폭력에 의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보여주는 고도의 연출 전략으로 느껴졌습니다.
시각적인 부분에서도 영월의 거친 자연풍광을 서늘하면서도 탐미적으로 담아낸 촬영 기법은 이 영화를 단순한 사극 그 이상으로 격상시킵니다. 특히 한명회가 등장할 때마다 정적을 깨는 압도적인 사운드 디자인과 단종의 고립감을 극대화하는 광각 렌즈의 활용은 감독이 이 작품에 얼마나 미학적 공을 들였는지 여실히 보여줍니다. 무엇보다 박지훈이라는 배우가 가진 서늘한 눈빛의 재발견과, 유해진이 보여준 '평범한 이의 숭고함'은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 후에도 긴 여운을 남깁니다.
결국 이 영화는 "역사는 거물들이 만들지만, 그 역사를 인간답게 갈무리하는 건 이름 없는 개인들"이라는 메시지를 장르적 쾌감 속에 훌륭하게 녹여낸, 근래 보기 드문 밀도 높은 사극 수작이라고 평하고 싶습니다.
* 영화 <왕과 사는 남자> 공식 예고편
https://youtu.be/9sxEZuJskvM?si=5ymyVZTS36a0pXH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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