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영화 장화, 홍련
이 영화는 김지운 감독의 2003년 작품으로 전래 동화 '장화홍련전'을 바탕으로 한 공포 영화입니다. <알 포인트>, <곡성>과 함께 한국 명작 공포 영화라는 평가를 받으며 해외에서도 최고의 한국 공포 영화를 꼽으면 대부분 이 작품을 언급합니다. 이 영화의 재미있는 점은 귀신이 갑자기 튀어나오는 ‘점프 스케어'만 잘 쓰면 된다는 기존 공포 영화의 상식을 깨버렸다는 것입니다. 귀신이 중심이 아닌데도 사람 숨통을 조이는 특유의 분위기들이 대단하고 이를 빼어난 영상미와 미장센, 등장인물 간의 심리적 압박감으로 풀어냈습니다. 또한 김지운 특유의 영상미와 그에 어울리는 유려한 음악(이병우 작곡)으로 호평을 받았습니다.
<조용한 가족>, <반칙왕> 등으로 주목받은 김지운을 본격적으로 충무로의 주류로 떠오르게 해 준 작품으로, 염정아에게는 배우로서의 자신을 재발견할 기회를, 거의 신인이나 다름없던 임수정과 드라마 <가을동화>로 주목받기 시작한 문근영에게는 인기를 가져다준 작품이기도 합니다.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 박찬욱의 <올드보이> 등과 함께 2000년대 한국 영화계의 세대교체와 발전을 알린 신호탄이라는 찬사도 받습니다.


2. 줄거리
영화는 정신 병원에서 한 여성이 고개를 축 늘어뜨린 채 의사와 만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의사는 자신이 누군지 아는지, 그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지만 여성은 말이 없습니다. 병원에 있던 여성은 '수미'(임수정). 과거로 돌아가 그녀는 동생 '수연'(문근영)과 같이 시골의 한적한 목조 가옥으로 들어갑니다. 둘은 병원에서 퇴원하는 길이었고 그들을 반기는 건 아버지 '무현'(김갑수)와 새엄마 '은주'(염정아). 은주는 아이들을 애써 밝은 표정으로 반기지만 수미와 수연의 태도는 냉랭합니다. 같이 식사를 하고 생활을 하는데도 불편한 분위기는 내내 유지됩니다. 수미는 대놓고 은주에게 반항을 하고 수연은 언니를 따라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합니다. 수미와 수연은 집안에서 갑자기 문이 열린다거나 여러 기이한 현상을 목격하고 불안에 떱니다. 무현은 은주의 약을 챙기지도 하지만 저녁에 한 침대에 누웠다가 혼자 방을 나와 따로 잡니다.

어느 날, 은주는 동생 부부를 집으로 초대합니다. 그런데 동생 부부는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불안하고 굳은 표정으로 계속 있습니다. 은주가 혼자 들떠서 과거 얘기를 하는데도 동생은 그런 기억이 없다고 딱 잘라 말합니다. 그리고 동생의 처는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고 동생 부부는 집을 나오게 됩니다. 동생은 처에게 오기 싫었지만 매형의 부탁으로 어쩔 수 없이 오게 됐다고 하고, 동생의 처는 싱크대 밑에서 귀신을 봤다고 합니다. 수미와 수연은 창고를 뒤적이다가 엄마와 함께 찍은 사진을 찾고 즐거워합니다. 은주는 수연의 방 청소를 하러 들어갔다가, 사진에서 자신의 얼굴만 수연이 잘라낸 것을 보고 크게 분노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아끼던 새가 수연 곁에서 죽어있는 것을 보고 은주는 수연을 장롱에 가둡니다. 수미는 그런 수연을 꺼내주어 다독거리고, 어느 날 수미는 피범벅이 된 포대자루를 발견합니다. 수미는 수연이 안에 있는 줄 알고 주방으로 포대자루를 끌고 가 풀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이 은주가 나타나 포대자루를 옷장에 넣어놨고, 수미는 은주와 몸싸움을 벌이다 머리를 부딪히고 기절하게 됩니다.
정신을 차린 수미는 아버지 무현과 대화하게 되고, 수미는 무현에게 은주가 수연을 학대하고 있다고 얘기하지만 무현은 제발 정신 차리라고 하며 수연은 죽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차분한 상태의 은주가 밖에서 들어옵니다. 무현의 말대로 수연은 죽은 상태였고 수미는 그 충격으로 정신질환을 앓고 있어서 수연, 은주까지 1인 3역을 해왔던 겁니다. 아픈 건 수미인데 약을 먹던 은주나, 굳은 표정으로 밥을 먹던 은주 동생 부부, 은주와 같은 잠자리에서 자지 않던 무현 등의 행동, 생리 주기가 같은 세 사람 등 이 사실은 수미가 수연, 은주 역할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오래전 수미, 수연의 엄마는 병을 앓고 있었고 무현은 같은 병원에 근무 중이었던 은주를 집에 데려옵니다. 그리고 불륜 행각을 하기 시작했고 자매와 은주 사이의 골은 깊어집니다. 그러다 엄마가 옷장에서 목을 매 자살을 하였고, 그것을 발견한 수연은 엄마를 꺼내려다 옷장이 뒤집어져 깔리게 됩니다.
은주는 소리를 듣고 방에 갔다가 그 현장을 보고 놀란 마음에 나오게 됩니다. 그래도 수연을 구할 심산으로 다시 방에 가는데 거기서 수미를 만나게 됩니다. 수미는 은주에게 독설을 내뱉고, 은주는 수미에게 지금 한 행동으로 후회 안 할 자신 있냐고 물어봅니다. 수미는 냉랭하게 대답하고 은주는 방으로 가지 않습니다. 수미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산책을 하고 은주는 그런 수연을 집에서 바라보다 창문을 닫으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3. 사운드트랙
이병우가 음악을 맡아 서정적이면서도 오싹한 오리지널 스코어를 작곡했습니다. 영화가 개봉 이후 많은 영화 팬들이 사운드트랙 음반 발매를 원했으나 이병우는 영화 OST를 너무 늦게 완성했고 그 사이 여러 편집이 가해져 음반을 제작할 여유가 없었다고 합니다. 또한 CD를 제작하기엔 트랙 수가 그리 많지 않은데 당시에는 적은 곡을 수록하는 싱글 앨범 규격이 흔치 않을 때라 발매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거의 영화 개봉 1주년이 되는 때인 2004년 7월쯤에 영화 <쓰리>에서 김지운이 연출을 맡은 메모리즈에 들어간 이병우의 음악들과 합쳐 <장화홍련, 메모리즈 OST>라는 타이틀로 발매했습니다.
메인타이틀에 해당하는 <에필로그>도 유명하지만 영화 막바지에 나오는 <돌이킬 수 없는 걸음>이 백미로, 대중적으로도 상당한 인지도가 있습니다. 언급한 두 곡 모두 동일한 멜로디를 공유하는데, 이 멜로디는 영화의 메인 테마로 작중에서 장면 분위기마다 알맞게 변주되어 나옵니다. 그렇기에 사운드트랙에 수록된 곡들에서 본 멜로디를 들을 수 있습니다.
사운드트랙은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영화, 드라마 음악상을 수상하는 등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장화, 홍련>의 할리우드 리메이크 <안나와 알렉스: 두 자매 이야기>에 쓰인 크리스토퍼 영의 음악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4. 영화의 해석
1) 크게 세 가지 반전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동생이 수미가 보는 환각이라는 것, 두 번째는 새엄마의 학대도 수미의 망상이라는 것, 세 번째는 이 모든 것이 수미의 정신병인 줄 알았으나 그와 별개로 귀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2) 작중 무현과 은주가 불륜이라고 직접적으로 말하거나 암시하는 장면이 없어 두 사람이 불륜 관계가 아니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아내와 두 딸이 있는 집에 버젓이 내연녀를 데려갔다는 게 개연성이 떨어지니, 은주가 집에 있는 이유는 전처의 간병인으로 일했기 때문이 아니겠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주가 단지 간병인일 뿐이라면 전처가 살아있을 당시 남동생 부부까지 집에 초대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불편한 듯 주눅 든 수연과 "이렇게 당신과 얼굴 마주 보는 것보다 후회할 일이 더 있겠느냐"며 쏘아붙이는 수미의 적개심이 설명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내와 딸들이 있는 집에 보란 듯이 내연녀와 그 가족까지 끌어들인 막장스런 상황이기에 수미가 은주에게 노골적으로 혐오를 표하고, 자매의 어머니가 곁에 잠든 수연을 두고 옷장 속으로 들어가 목을 매는 상황까지 가게 되었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3) 자꾸만 헛소리를 해대는 수미에게 무현은 이러지 말라거나 그 얘긴 안 하기로 했잖냐는 등 핵심을 회피하는 화법을 구사합니다. 중반 이후 수연의 죽음이라는 반전의 빌드업이긴 하나, 작중 내적으로 보면 정신병 걸린 딸에 대한 아버지로서의 인내심과 모든 게 자신의 불륜 때문이라는 인식, 그리고 정신병자를 부양하는 가장으로서의 무력감이 더해진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4) 영화 내내 은주가 수연을 학대하는 모습은 사실상 수미의 죄의식을 표현한 셈입니다. 수미는 수연을 구하지 못한 자신의 죄책감을 은주의 모습으로 투영합니다. 그리고 반복하여 은주에게서 수연을 구하는 자신을 연기함으로써 죄의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은주의 학대는 비이성적이고 과장된 면이 강합니다. 물론 결말에 나온 실제 은주를 보면 자기 기분 나쁘다고 사람이 죽어가는 걸 방치했으니 진짜 은주도 정상적인 인물은 아니긴 하나, 적어도 수미와 마주치기 전까진 양심의 가책을 느껴 구해주려는 인간적인 면모도 조금이나마 있습니다.
5) 수미의 환상과는 별개로 집에 원혼이 서린 듯한 암시가 자주 나옵니다. 작중 나오는 원혼이 둘인 걸 보면, 전처와 수연 둘 다 원혼으로 있으며 오히려 수미의 정신병보다는 최후반에 사실 집에 진짜 원혼들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는 장면이 더 놀랍다는 평도 있습니다. 수미가 미쳐서 있지도 않은 헛것을 봤다고 여기며 마음을 놓은 관객들 앞에 진짜 원혼이 나타나게 됩니다. 복선은 있는데, 처남댁이 발작 중에 바닥에 무언가가 있는 걸 본 장면입니다. 처남댁은 본 작의 관계자들 중에 가장 거리가 먼, 사실상 거의 외부인이고 수미가 앓는 정신병과도 무관해 정신이 멀쩡한 그녀가 원혼을 목격했다는 것은 그것이 실재한다는 뜻입니다. 수미의 연속 반전의 임팩트에 묻혀 이것까지 아닌가라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5. 마무리
이 영화는 결말까지 완벽한 것으로 꽤 유명합니다. 2003년 당시 고등학생때와 지금의 아이 엄마 입장에서 보는 영화는 정말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결말까지 소름이 돋는 영화는 꽤 오랜만이었습니다. 영화의 연출에서 옛 한국 영화의 감성이 묻어 나오지만, 공포영화로서의 본분을 놓치지 않은 몇 안 되는 영화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공포영화로 성공하기가 정말 쉽지 않은데 현재까지도 <곡성>, <알포인트>와 함께 극찬받는 한국 공포영화인 이유를 보여주는 영화였습니다. 개인적으로 곡성보다는 무서운 장면이 덜했으며, 귀신이 직접적으로 나오는 것보다는 영화 내내 유지되는 긴장감과 결말의 반전이 정말 잘 표현된 영화라는 생각이 들어 공포 초보자에게 입문용으로 매우 추천합니다.
또한 2번 이상 시청을 추천합니다. 오랜만에 다시 보고 나니, 결말을 알고 보면 보이는 떡밥이 정말 많으며, 찾는 재미가 쏠쏠한 영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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